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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 루체 (디자인, 파워트레인, 가격 정당성)

by lineup 2026. 5. 27.

 

유튜브에서 페라리 신차 영상이 올라오면 저는 습관처럼 이어폰부터 찾았습니다. 엔진 소리를 먼저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번 페라리 루체는 달랐습니다. 영상을 틀었는데 심장이 조용했습니다. 페라리 역사상 최초의 순수 전기차, 루체가 가슴을 뛰게 만들지 못하는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짚어봤습니다.

조니 아이브가 페라리의 야성을 지워버렸다

솔직히 처음 루체를 봤을 때 드는 감정은 실망 이였습니다. 주관적으로(어디까지나 저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페라리 루페 못생겼습니다.

루체의 전체 실루엣은 티어드롭(Teardrop) 디자인을 채택했습니다. 티어드롭 디자인이란 물방울이 낙하하는 형태를 본뜬 차체 형상으로,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앞쪽을 볼록하게, 뒤쪽을 날카롭게 처리하는 방식입니다. 페라리 역사상 가장 낮은 공기저항 계수를 달성하기 위해 채택됐다고 하니 기술적으로는 의미 있는 선택입니다.

글래스 하우스(Glass House)라는 개념도 이 차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글래스 하우스란 차체의 벨트라인 위쪽, 즉 앞뒤 유리창과 측면 유리, 기둥, 지붕을 아우르는 자동차 상단 전체를 일컫는 용어입니다. 루체는 유리와 금속 창틀 사이의 경계를 극한까지 지워서 이 부분 전체가 거대한 유리 캡슐처럼 보이도록 설계됐습니다.

문제는 이 디자인을 주도한 곳이 애플의 전성기를 이끈 조니 아이브의 디자인 회사 러브프롬이라는 점입니다. 조니 아이브는 아이폰과 맥북을 매끈한 알루미늄 유니바디로 감싸 혁신이라는 평가를 받은 디자이너입니다. 가전제품에서는 그 심리스(Seamless) 철학이 통했습니다. 심리스란 경계나 이음새 없이 하나로 매끄럽게 이어진다는 의미로, 복잡한 내부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디자인 방식입니다. 그런데 슈퍼카에서 디자인이란 성능을 숨기는 도구가 아니라 야성을 드러내는 수단이어야 합니다.

제가 페라리를 좋아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 있었습니다. 날카롭고 위험해 보이는 그 긴장감, 공기역학 부품이 노골적으로 튀어나온 공격적인 비율, 대배기량 엔진을 담고 있다는 걸 온몸으로 암시하는 프로포션. 그런데 루체는 그 모든 긴장감을 매끈하게 지워버렸습니다. 멀리서 보면 중국 전기차 브랜드의 콘셉트카와 구분이 잘 안 됩니다. 페라리 엠블럼을 떼면 어느 브랜드 차인지 확신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솔직히 들었습니다.

페라리 루체 1,500마력인데 왜 특별하지 않은가

페라리 루체의 파워트레인 수치를 처음 봤을 때 저도 잠깐 눈이 갔습니다. 전륜 모터 두 개 각 142마력, 후륜 모터 두 개 각 421마력, 합산 최고 출력 1,500마력, 제로백 2.5초, 최고 속도 시속 310km. 숫자만 보면 분명히 압도적입니다.

그런데 이 수치가 주는 감흥이 왜 이렇게 적을까요. 비교 대상을 놓고 보면 이유가 바로 보입니다.

  • 테슬라 모델 S 플래드: 1,020마력, 제로백 2.1초, 약 1억 3,800만 원
  • 메르세데스 AMG GT 4도어 전기차: 1,169마력, 제로백 2.1초
  • 샤오미 SU7 울트라: 1,548마력, 제로백 1.98초, 뉘르부르크링 전기차 랩타임 1위
  • 페라리 루체: 1,500마력, 제로백 2.5초, 약 9억 5,000만 원

9억 5,000만 원을 내면 제로백은 오히려 테슬라보다 0.4초 느립니다. 전기 모터는 배터리 용량을 키우고 코일을 더 감으면 누구나 천 마력 이상을 만들 수 있는 부품이 됐습니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코모디타이제이션(Commoditization)이라고 합니다. 코모디타이제이션이란 한때 희소하고 비쌌던 기술이나 가치가 보편화되면서 그 희소성과 가격 경쟁력을 동시에 잃어버리는 현상을 말합니다. 1960년대 수천만 원짜리 기계식 시계의 정확도를 1969년 세이코의 쿼츠 시계가 단숨에 따라잡았던 것처럼, 지금 전기 모터가 슈퍼카의 속도를 코모디티로 만들고 있습니다.

페라리의 12칠린드리가 대표적인 반례입니다. 유로 6e 배출가스 규제, 즉 유럽 연합이 내연기관 차량에 부과하는 가장 엄격한 배기 기준이 시행되는 시대에 터보나 전기 모터의 도움 없이 9,500rpm까지 돌며 830마력을 내는 순수 자연흡기 V12 엔진을 양산차에 올렸습니다. 이건 기술이 아니라 집착에 가까운 장인 정신입니다. 그 고집과 스토리에 사람들이 수억 원을 기꺼이 냈던 겁니다. 루체의 전기 모터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습니다(출처: 유럽환경청).

페라리도 이 한계를 알고 가상 사운드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쿨런트 넥슬 하우징의 정밀 가속도계를 통해 회전 부품이 실시간으로 만들어내는 진동과 소리를 포착해 필터링, 이퀄라이징, 증폭 과정을 거쳐 실내로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기계 자체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증폭시켰다는 점에서 다른 브랜드의 가상 사운드와는 출발점이 다르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러나 제 경험상 엔진 사운드의 감동은 소리 자체만이 아니라 그 소리가 만들어지는 과정, 기계가 살아 움직이는 느낌 전체에서 옵니다. 스피커로 재현된 소리는 결국 재현입니다.

페라리 루체 9억 5,000만 원, 이 가격에 새로운 답이 있어야 한다

페라리 루체는 스포츠카가 아닙니다. 길이 5,026mm의 준대형 4도어 크로스오버이고, 페라리 최초의 5인승입니다. 랩타임을 깎는 용도가 아니라 다섯 명이 타고 편안하게 장거리를 이동하는 그랜드 투어러(GT), 즉 장거리 고성능 크루저의 역할을 맡은 차입니다.

그렇다면 9억 5,000만 원짜리 럭셔리 GT 전기차가 2025년에 보여줘야 할 혁신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저는 이동하는 공간 안에서의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전기차 시대의 궁극적인 럭셔리는 차가 나 대신 집중해주는 동안 내가 그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쓸 수 있는 경험이어야 합니다. 내연기관 시대의 럭셔리가 운전자가 차에 집중하는 것이었다면, 전기차 시대의 럭셔리는 차가 운전자를 위해 집중해주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루체의 ADAS(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 구성을 보면 아쉬움이 큽니다. ADAS란 센서와 카메라를 활용해 운전자의 조작을 보조하거나 대신해주는 전자 시스템 전반을 말합니다. 루체에 탑재된 항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 ACC(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앞차와의 거리를 자동으로 유지하는 속도 조절 시스템
  • AEB(자동 긴급 제동): 충돌 위험 감지 시 자동으로 브레이크를 작동시키는 시스템
  • LDW(차선 이탈 경고): 차선을 벗어날 경우 경고를 주는 기능
  • LKA(차선 유지 보조): 차선 안에서 차를 유지하도록 조향을 보조하는 기능
  • BSD(사각지대 감지): 측후방 사각지대의 차량을 감지하는 기능

이건 레벨 2 수준의 운전자 보조입니다. 현대차에도 기본으로 들어가는 기능들입니다. 핸즈프리 주행이나 그 이상의 자율주행 기능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9억 5,000만 원짜리 럭셔리 GT가 이동 경험의 혁신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글로벌 자율주행 기술 개발 동향을 보면 레벨 3 이상의 상용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가격대의 차가 레벨 2에 머무는 건 선택이 아니라 공백처럼 느껴집니다(출처: 국제자동차기술자협회 SAE International).

내연기관 페라리는 V12 엔진의 고동감으로 그 가격의 존재 이유를 증명했습니다. 루체는 전기차 시대에 그걸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지, 아직 답이 없습니다. 60개 이상의 신규 특허, SK온과 공동 개발한 배터리, 12만 시간 이상의 연구 개발이 들어간 차라는 건 압니다. 그 노력은 진심으로 존중합니다. 그러나 페라리의 역사상 최초의 전기차가 정의해야 할 "전기차 시대의 페라리다움"에 대한 답이 아직 루체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루체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결국 이겁니다. 잘 만든 차인가, 라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갖고 싶은 페라리인가"라는 질문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남습니다. 전기차 전환이라는 피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페라리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떻게 재정의할지, 다음 모델에서 그 답이 나오길 기대해봅니다. 여러분은 지금의 루체에 9억 5,000만 원을 쓸 이유를 찾으셨나요?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_jDgzklyJ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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