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인지로버 SV 블랙의 가격은 3억 7천만 원 수준입니다. 처음 이 수치를 접했을 때 솔직히 "그 돈이면 아파트 한 채인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차를 들여다볼수록, 단순히 비싼 SUV가 아니라 자동차라는 물건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기준점처럼 느껴졌습니다.
2027레인지로버SV블랙 컬러 하나에도 급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블랙은 그냥 검은색 하나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SV 블랙을 직접 보고 나서 그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 차의 블랙 도장에는 금속 입자, 즉 메탈릭 플레이크(metallic flake)가 배합되어 있습니다. 메탈릭 플레이크란 도료 안에 섞인 미세한 금속 조각으로, 빛의 각도에 따라 색감이 미묘하게 달라 보이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이 기법을 쓰면 차체 부위마다 소재가 달라서 색이 미세하게 어긋나 보이는 경우가 생긴다는 점입니다. 알루미늄 패널, FRP 범퍼, 플라스틱 몰딩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빛을 흡수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차를 꼼꼼히 살펴봤을 때 인상 깊었던 건, 앞 범퍼부터 뒤 범퍼까지 소재가 달라도 전부 하나의 블랙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23인치 휠의 볼트 하나, 캘리퍼, 심지어 랜드로버 배지까지 전부 같은 블랙 톤으로 마감되어 있습니다. 이 배지는 1,000도가 넘는 고온 공정을 거쳐 인증받은 장인이 10주에 걸쳐 제작한다고 합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게 명품과 고가 제품의 차이를 만드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SV 블랙 외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핵심 디테일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소재가 달라도 전 부위 블랙 컬러 통일 (알루미늄, FRP, 플라스틱 포함)
- 23인치 휠 볼트 및 캘리퍼 블랙 마감
- 랜드로버 엠블럼 블랙 배지, 장인 수제 제작
- 후면 레터링 및 범퍼 하단부 전체 블랙 처리
2027레인지로버SV 니어 아닐린 가죽과 메리디안 오디오, 숫자보다 감각이다
차에 탑승했을 때 가장 먼저 느끼는 건 시트입니다. 레인지로버 기본 사양에는 세미 아닐린(semi-aniline) 가죽이 적용됩니다. 세미 아닐린이란 아닐린 가죽 위에 보호 코팅을 입힌 것으로, 내구성을 높이되 가죽 본연의 질감은 일부 희생하는 방식입니다.
SV 블랙에는 한 단계 위인 니어 아닐린(near-aniline) 가죽이 들어갑니다. 니어 아닐린이란 최소한의 코팅만 가하여 가죽 원래의 촉감과 숨결을 최대한 살린 소재입니다. 시트에 앉는 순간 그 차이가 바로 손바닥에 전해집니다. 제 경험상 이런 소재 차이는 사진이나 스펙표로는 절대 전달이 안 됩니다. 직접 손으로 눌러봐야 이해가 됩니다. 또한 일반 레인지로버에 있는 퀼팅 패턴이 SV 블랙 시트에는 없는데, 이는 착좌감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해 몸에 닿는 면적을 고르게 분산시키기 위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오디오 시스템도 마찬가지입니다. 메리디안(Meridian)은 영국의 하이엔드 오디오 브랜드로, 랜드로버와 같은 영국 기반입니다. SV 블랙에는 35개 스피커와 1,680와트 출력의 메리디안 시스템이 탑재됩니다. 여기서 출력 와트(wattage)란 스피커가 소리를 내기 위해 사용하는 전기 에너지의 양으로, 수치가 높을수록 소리의 전달력과 다이나믹 레인지가 풍부해집니다. 단순히 스피커 수가 많다고 음질이 좋은 게 아닙니다. 출력이 부족하면 볼륨을 높여도 소리가 뭉치고 왜곡이 생깁니다.
제가 직접 들어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바디 앤 숄더(Body & Soul) 기능, 즉 시트 자체에 진동 액추에이터를 내장해 음악의 저음역대를 신체로 전달하는 기술까지 더해지니, 이건 자동차 안에 앉아 있다기보다 작은 콘서트홀에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국내 럭셔리 자동차 시장 규모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며, 2023년 기준 국내 수입차 판매량에서 5천만 원 이상 차량의 비중이 전체의 절반을 넘어섰습니다(출처: 한국수입자동차협회). 그만큼 고가 차량에 대한 감각적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비스포크 스튜디오, 차를 사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
비스포크(bespoke)란 원래 영국 새빌 로(Savile Row)의 맞춤 양복 문화에서 유래한 단어로, 고객의 주문에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개별 제작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랜드로버는 이 개념을 자동차에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비스포크 스튜디오를 통해 완성된 레인지로버는 2023년형 기준 전 세계에 약 400대 수준이라고 합니다. 외장 컬러는 단순히 팔레트에서 고르는 게 아닙니다. 빛의 각도에 따라 색감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야외와 실내에서 각각 어떻게 보이는지를 시뮬레이션하며 선택합니다. 심지어 "바닷가에 햇빛이 비치는 순간의 색감"처럼 추상적인 감각을 컬러로 구현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제 생각에 이런 방식은 자동차 소비의 본질을 바꾸는 것에 가깝습니다. 이동 수단을 구매하는 게 아니라, 나만의 오브제를 의뢰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물론 통카본 휠처럼 복원이 불가능한 소재를 선택하거나, 도어 스커프에 개인 문양을 새기는 순간 그 차는 사실상 재판매가 어려워집니다. 이 점에서 비스포크는 명확히 "나 자신을 위한 소비"이지 자산으로서의 자동차 구매와는 거리가 멉니다.
한편, 글로벌 럭셔리 자동차 시장은 2030년까지 연평균 7%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출처: McKinsey & Company). 다만 이 성장의 이면에는 전동화라는 거대한 전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배기량 가솔린 엔진을 기반으로 한 럭셔리 SUV가 전기차 시대에도 지금과 같은 상징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랜드로버도 이미 전동화 로드맵을 발표한 상태이고, 비스포크 문화가 전기 플랫폼에서도 같은 감성을 줄 수 있는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부분입니다.
레인지로버 SV 블랙은 확실히 SUV 중에서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는 차입니다. 그 기준이 성능이나 실용성이 아니라 감각과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점에서, 이 차는 처음부터 다른 관점으로 봐야 합니다. 3억이 넘는 가격을 단순히 이동 수단으로 환산하면 공감하기 어렵지만, 나만의 공간과 취향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결과물로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저는 현실적으로 이 차를 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만, 이 차가 왜 존재하는지는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이런 차에 관심이 있다면 랜드로버 비스포크 스튜디오를 직접 방문해 보는 것을 권합니다.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가죽 한 겹, 소리 한 음의 차이를 절대 느낄 수 없습니다.